* 오리지널 캐릭터 주의.

* 오타 주의.

* 개연성 없음 주의.

* 오랜만에 쓰는데 점점 막장으로 치닫는 기분. 하지만 원래 떡소설을 생각하고 쓰는 거니까!(빵긋)

* 퇴고는 조금 있다가.



걷힐 생각이 없어 보이던 파파베르의 눈꺼풀이 아주 천천히 개었다. 흐릿한 눈동자를 감싼 눈매가 다소 날카롭던 평소와 달리 고통과 피로로 인해 힘이 없었다.


겨우 눈을 뜬 그는 아직 초점이 잡히지 않은 시야에 몇 번이고 눈을 감았다 떴다. 흐릿하던 눈동자에 점차 초점이 제대로 잡혔다.


꽤나 익숙한 배열의 나무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을 찬찬히 살핀 파파베르는 온몸을 관통하는 고통에 작게 신음을 흘리며 정신을 잃기 전 상황을 필사적으로 더듬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제대로 된 서사를 잃어버린 기억은 끝을 알 수 없는 엉킨 실타래와 다를 바가 없었다.


뒤죽박죽 엉킨 기억을 떠올리는 것을 결국 포기하고 성한 데라고는 하나 없어 보이는 몸을 움직여 주위를 살폈다. 누워있는 채로 고개만 돌리는 작은 움직임에도 마디마디가 비명을 질러댔다. 파파베르는 애써 차오르는 신음을 목구멍 뒤로 삼켰다.


“.... 아....”


허나 그라 할 지 라도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침음성은 주어 삼킬 수 없었다. 단발마의 탄성이 힘없이 선실 안을 작게 울렸다.


푸른색도 연두색도 아닌 눈동자에 비춰진 풍경이 낯설다. 여느 배들과 그리 다를 바가 없는 천장과는 대조적으로 선실 내부는 흘려보아도 그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을 만큼 달랐다.


이곳은 오로 잭슨 호가 아니다.


그 사실이 빠르게 뇌리를 점령하자 파파베르의 얼굴이 삽시간에 공포에 질렸다. 빠르게 오른 심장소리가 쿵쿵 귓전을 때렸다.


“ㄹ, 레일....”
“어! 일어났구나!”


본능처럼 비명을 대신해 터져 나온 이름이 요란한 경첩 소리에 묻혔다. 당혹스러움과 공포가 선연한 눈동자가 목소리의 주인에게로 향했다.


반들반들한 선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커다란 덩치가 어울리지 않는 소년이었다. 밝은 금발과 앳 띤 얼굴이 단번에 뛰어오른 파파베르의 공포와 경계심을 조금 가시게 했다. 하지만 곧 그가 걸치고 있는 해군복과 낯선 주변 상황에 바르작거리며 겨우 몸을 일으켜 최대한 벽에 붙어 앉았다.


“다, 우왁!”


반가운 기색이 만연한 얼굴로 방에 들어선 소년은 도대체 어디에 걸린 건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대차게 넘어졌다. 그 소리가 워낙 심상치가 않아서 파파베르는 저도 모르게 몸을 보호하기 위해 둘러싼 두툼한 이불을 쓸러내고 엎어진 소년을 불렀다. 얼굴까지 완벽하게 바닥에 처박아 코가 깨진 건 아닌지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ㅈ, 저기.... 괜찮으세....”
“괜찮아!”
“히끅!”


파파베르의 걱정이 무색하게 소년은 멀쩡한 얼굴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소년이 다치지 않은 것은 다행스러웠으나 지나치게 큰 목소리와 동작은 낯선 상황에 겁을 집어 먹은 파파베르를 위협하기 충분했다. 달리 몸을 보호할 만한 것이 없었기에 그는 다시금 두툼한 이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어, 어. ㅁ, 미안. 무서워하라고 그런 건 아닌데. 거의 나흘 동안 안 일어나서. 반가워서 그런 건데.”


예상과 전혀 다른 파파베르의 배타적인 태도에 소년의 목소리에서 금세 힘이 빠졌다. 그는 제가 구한 아름다운 이가 눈을 뜨면 저를 향해 환히 미소를 지어줄 것이라 줄곧 상상했기 때문에 출혈이 더 컸다. 파파베르보다 족히 한 뼘은 훨씬 더 큰 덩치로 그는 어쩔 줄 몰라했다.


“내가, 내가 너 구했거든. 물에 빠져서. 그냥. 막 몸은 차가운데, 식은땀은 나고 걱정돼서.”


횡설수설. 매끄럽지 못 한 말들을 주워섬기는 것을 들으며 파파베르는 슬그머니 뒤집어 썼던 이불을 내렸다. 눈동자에는 아직 불안과 경계, 공포와 혼란이 섞여 혼란스러운 모양새였지만, 소년은 파파베르가 제게 눈을 맞춰 주는 것에 만족했다.


“춥지는 않아? 몸 진짜 차갑던데! 막 열은 안 나고. 눈도 안 뜨고. ㄴ, 내 손도 안 놔줬는데....”


만족감은 오래 가지 못 했다. 파파베르가 말없이 저를 바라만 보고 있자 소년의 목소리는 점차 작게 잦아들어 갔다. 당연한 수순대로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ㅇ, 이름이 뭐야? 난 돈키호테 로시난테야. 해군 본부 일병이고.”


짧지만 묵직한 침묵을 견디지 못 한 소년이 다시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시도가 무안해지게 또 다시 침묵. 50년 같은 5분이 더디게 지나갔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 록 고조되는 어색함에 로시난테가 억울해지기 시작할 때(그래도 내가 구해줬는데!)쯤 파파베르의 모양새 좋은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파파베르 라미아입니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까는 서로 놀라 몰랐지만 칼칼한 목에서 끊어질 듯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거칠했다. 도톰한 이불이 무슨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 마냥 꼭 잡고 있는 모습이 화려한 외모와 함께 한 없이 가련하고 안쓰럽게 박혔다. 처음보다 훨씬 조심스러운 태도로 파파베르의 기색을 살핀 로시난테는 손을 뻗어 컵에 물을 부었다. 배려심이 넘치는 아주 섬세한 대처였지만 그 결과물은 그리 좋지 못 했다. 도대체 어떻게 조준을 하는 건지 컵 안에 떨어지는 물 반, 바닥과 침대 이불을 적시는 물이 반이었다. 이쯤 되면 일부러 저러는 건가 의심스러워질만 했다.


“자.”
“감사합니다.”


그래도 다행히 반절은 채운 컵을 받아든 파파베르는 로시난테의 눈치를 보며 조금씩 물을 삼켰다. 그러나 반대로 로시난테는 어지간히도 만족스러운지 파파베르를 보며 흐뭇한 얼굴로 만면 가득 뿌듯한 웃음꽃을 피웠다.


미지근한 물이 가뭄이 찾아든 논두렁 마냥 쩍쩍 갈라져 조금은 따갑기까지 한 목구멍을 촉촉하게 적셨다. 눈치를 보아가며 홀짝였음에도 불구하고 컵은 금세 바닥을 보였다.


컵의 반을 겨우 채운 물은 사흘 묵은 갈증을 해갈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러나 소심하기로는 둘째라면 서러운 파파베르에게 익숙한 로저 해적단도 아니고 이제 얼굴을 맞댄 로시난테에게 요구하기란 그 허들이 지나치게 높았다. 결국 차마 입으로는 말하지 못 하고 그는 애꿎은 눈동자만 도르륵도르륵 굴렸다.


다시금 둘은 묵언수행 아닌 묵언수행에 돌입했다. 또 말이 끊기자 파파베르만큼이나 눈치를 살피던 로시난테는 물기 어린 눈동자가 계속해서 물병을 잡은 자신의 손언저리르 배회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음... 저기...”


로시난테의 작은 목소리에 파파베르는 화들짝 놀랐다. 어지간히도 새가슴이다, 그는 생각했다. 로시난테는 저가 최대한 무해하게 보이기를 기도하며 파파베르를 향해 미소 지었다.


“물 더 줄까?”
“...... 네.”


말문이 트이니 조금 느리더라도 대답만은 꼬박꼬박 잘 했다. 로시난테는 정말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아무리 둥글둥글한 성격의 그라고 할 지 라도 혼자서 떠는 대화는 사양이었다.


“자.”
“.......”
“왜?”
“ㅇ..... 아니요...”


이번에도 반은 이불의 수분 보충용으로 전락했다. 물론, 지적할 담력도, 의지도 없는 파파베르는 아까와 같이 얌전히 컵을 입으로 가져갔을 뿐이다.


“저기. 왜 바다에 빠졌는지 물어봐도 돼?”


파파베르가 물을 다 마신 걸 확인한 로시난테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그로써는 자신이 직접 뛰어 들어가 구조해온 눈앞의 존재에게 상당한 호감과 호기심을 지고 있었다. 생일이 지나면 이제 열 넷이 될 소년에게 눈앞의 미인은 여러 가지 의미로 충분히 자극적이었다. 그리고 굉장히, 아주, 엄청 변명 같지만 절차상의 이유도 있었다.


호감을 기반으로 한 로시난테의 질문은 질문자의 의도는 어떨지 몰라도 받는 이에게 지나치게 무겁게 다가왔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노예였으며, 또 해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절망스럽게도 지금 그가 몸을 의탁하고 있는 곳은 눈앞에 앉은 로시난테의 차림새를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해군 군함이었다. 아무리 낙천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좋은 상황이라 말할 수 없었다. 그나마 상황이 최악을 면한 것은 파파베르에 대한 수배지가 나온 적이 없다는 점 하나 때문이었다. 그는 아랫입술을 사려 물었다.


그래. 그는 해적이었다. 그를 보호해주던 태산 같은 남자도 해적이었다. 레일리. 실버즈 레일리. 채 추스르지 못 한 기억들이 순서 없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피부 위를 아프게 내려치던 빗물 사이에서 악을 내지르는 모습이 점점 선연해졌다. 차마 닿지 못 한 손끝이 아려왔다. 파파베르는 그 아릿함을 잊기 위해 뾰족한 손끝을 제 손바닥으로 덮어 눌렀다. 아프다. 연한 고통이 그의 귓가에 속살거린다.


레일리는 없어.


그 순간 이 넓은 바다에서 홀로라는 사실이 어떤 때보다도 섬뜩하게 훌쩍 가까워졌다.


후두둑. 말릴 새도 없이 차오른 눈물이 뺨을 타고 이불 위로 와르르 떨어져 내렸다. 토옥. 토옥. 하얗게 걸린 얼굴로 입을 다문 채 눈물만 쏟아내는 파파베르의 모습에 로시난테는 당혹스러웠다.


“어, 어?! 울지, 울지 마아! 내가 ㅁ, 미안해!! 미안!”


어떡하지. 나 혼자야. 어떡하지. 너무 무서워. 또 혼자야. 누가, 누가 날 좀.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에 뺨이 흥건히 젖어들었다. 파파베르의 울음은 소리 없이 선실 안에 넓게 퍼졌다.


“아-라라라. 거기서 뭐하지, 로시난테 일병.”


차마 몸에 손을 대지는 못 하고 안절부절 하는 로시난테의 뒤로 크게 그늘이 졌다. 침대에 상체만 일으킨 파파베르나 아까 엎어진 상태에서 바닥에 엉덩이를 붙인 로시난테나 뒤에서 나타난 남자에 비해 한 없이 작았다.


“ㅋ, 쿠잔 소장님!”


계급이 깡패라고 소년의 목소리에 눈 깜짝할 새 군기가 팍 들어갔다.


“갑판 청소 감독하러 갈 때가 아닌가?”
“예, 옛! 그렇습니다!”
“근데 내가 보기에 여긴 갑판이 아닌 거 같은 걸?”
“시정하겠습니다!”
“아아. 너무 그렇게 빡빡하게 대답 안 해도 돼. 어쨌든 수고하라고.”
“예!”


잊었던 할 일을 상관에게 지적 받아 허겁지겁 선실을 나서면서도 로시난테는 계속해서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 파파베르에게서 눈을 떼지 못 했다. 하지만 그는 까라면 까야 할 계급제의 노예였다. 자신의 상사가 일단 민간인에게는 무해하고 훌륭한 군인임을 애써 상기하며 로시난테는 아쉬운 발걸음으로 선실을 나섰다. 그리고 그 길에 앞서 그는 갑판 청소를 하기도 전에 한 번 더 얼굴로 선실 바닥을 청소했다.


“일어났군.”
“.....”


선실 안에 둘만이 남자 로시난테와 마찬가지로 파파베르가 앉은 침대 근처 바닥에 엉덩이를 붙인 쿠잔은 검은색 안경 알 너머로 그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눈길이 노골적이고 지나치게 서늘하며 날카로웠다. 온전한 인간이라 할 수 없는 파파베르의 외적인 특징을 비롯하여, 목격 장소와 시기 등이 의뭉스러웠기가 짝이 없기 때문이었다.


물에 빠진 파파베르가 구조된 곳은 거리는 있었지만 로저 해적단에 관한 신고가 들어온 곳과 그리 멀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들은 간발의 차로 로저를 놓쳤기 때문에 해역 근처에 오로 잭슨 호를 제외하면 눈에 띌 만한 선박이 없었다는 사실은 쿠잔의 의심을 더욱 크게 부채질 했다. 그러나 작은 의심만으로 상대를 몰아붙이는 것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확실한 증거를 잡아낸다면 모를까.


작은 안경알에 가려진 눈은 여전히 날카롭기 짝이 없었으나 대신 쿠잔은 부러 느긋한 모양새로 입매를 늘어뜨렸다. 비현실적인 외모가 경계심을 부추겼지만, 또 한 편으로는 눈앞에 한 가득 쏟아진 야들한 외모 탓에 마음이 조금 약해지기도 했다. 그는 반 쯤 얼이 빠져 눈물을 흘리는 파파베르의 체향을 양껏 들이마셨다. 주인을 닮은 향이 달디 달았다.


자신만의 생각에 빠진 파파베르 못 지 않게 쿠잔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로시난테의 품 안에 안겨 군함에 오르던 파파베르를 떠올리고 있었다. 바다 내음이 미처 가리지 못 한 진한 향기라던가, 젖은 몸에 비늘처럼 달라붙은 천 조각 같은 것 말이다. 그러고 보니 저 얄쌍한 몸에 문신도 꽤나 많이 있었더랬다. 과연 어떤 이가 저 몸을 더듬어가며 제 흔적을 새겼을까. 쿠잔은 저도 모르게 갈증이 일어 혀로 입술을 적셨다. 아랫배가 조금 뻐근해졌다. 욕구 해소에 소홀해져 본 적이 없어 거의 느낄 일이 없던 기묘한 감각이 그를 덮치기 위해 몸을 부풀렸다. 개인적인 감정과 업무 상의 이유들이 파파베르를 해군 본부에 묶어두어야 한다고 부추겼다.


경계심과 성적인 열기가 뒤섞인 눈길이 눈물에 푹 젖은 얼굴에 끊임없이 향하는 동안 날카로운 이에 시달림을 당한 애꿎은 입술이 피를 터뜨렸다. 그 순간 파파베르를 중심으로 한 달큼한 향취가 더욱 진해졌다. 쿠잔의 눈매가 더욱 가늘게 좁아졌다.


“피를 보지 않는 게 좋겠군. 향이 더 진해졌잖아.”


그렇게 말하는 그의 긴 손가락이 피가 번진 파파베르의 아랫입술을 꾹 눌러 닦았다. 털 끝 하나라도 건들지 못 한 로시난테에 비하면 무례하기까지 한 접촉이었다.


입술을 훑고 지나가는 열기에 눈가가 닳아 오른 채로 파파베르는 쿠잔을 보았다. 묵직한 무게감이 남자를 감싸고 있었지만, 눈을 가린 그는 표정을 읽기가 어려웠다. 때문에 그가 자신을 보며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파파베르는 알 수 없었다.


“왜 바다에 그런 꼴로 있었지?”


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그는 파파베르를 경계하고 있었다.


쿠잔의 속을 전혀 알 수 없었기에 약간의 경계심과 의심이 묻어난 (파파베르가 생각하기에)지극히 사무적인 목소리가 물음을 전했다. 한 동안 로저 해적단과 생활하면서 호의와 호감에 비교적 익숙해져 있던 파파베르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쿠잔과 같은 태도가 익숙했다. 그래서 일까 그는 로시난테가 물었을 때보다는 담담하게 질문에 대답할 수 있었다.


"….. 폭풍…. 우로…. 배에서 떨…. 어졌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울음으로 목이 먹먹하게 매여들어 갔다.


"….. 해적인가?"


그렇게 질문을 하면서도 그는 어떤 멍청이가 해군 앞에서 저를 해적이라 말할까 작게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반대로 파파베르의 얼굴은 쿠잔이 보지 못 하는 각도에서 미미하게 굳어졌다.


해적인가. 해적… 그래. 그'는' 해적이다. 그'도' 해적이다. 파파베르 라미아는 해적이다. 실버즈 레일리도 해적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 할 수 있을리가.


솜씨 좋게 거짓말을 줄줄 읊을 수 있을 정도로 파파베르는 주변 머리가 좋지 못 하다. 그렇다고 지금 해적이라고 제 입으로 말하는 것은 세상에 다시 없을 정도로 멍청한 짓임에 틀림이 없었다. 결국 늘 그렇듯이 그에게 남은 것은 눈 앞의 강자에게 엎드려 동정을 사고, 총애를 사서 바닥을 기며 살아 남는 것뿐이다.


그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처음부터 말이다.


파파베르는 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여 쿠잔의 눈 앞에 사내 치고 가녀린 목덜미를 유혹적으로 내보였다. 동정심을 자극할 수 있게 여즉 부여 잡고 있던 손으로 제 팔을 교차에서 껴안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덕분에 작게 웅크린 몸이 쳐연하고 안쓰럽게 보였다. 달큼하고 어지러운 향취가 안 그런 척 젊은 해군을 향해 진득한 유혹의 손길을 뻗었다.


길고 촘촘한 속눈썹에 짙게 그늘진 푹 젖은 눈매에서 시작된 굵은 눈물 방울이 척척한 뺨을 타고 갸름한 턱선 끝에 아롱졌다. 스스로에 대한 역겨움과 참담함에 눈을 내려감으며 파파베르는 절망을 담아 작게 대답했다.


"….. 노예… 입니다…."


그것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사실. 파파베르 라미아는 노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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